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는 온가족이 둘러 앉아 커다란 KFC 치킨을 먹는 날이었죠. 지금 되돌아 보니 재밌네요. 성탄절의 명절 음식이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이라니. 그러다 몇 년 전부터 서울의 빵집 진열대에 ‘슈톨렌’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베를린에서 꽤 오래 살았던 저로서는 그 투박한 빵 덩어리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올해는 백화점과 편집숍 곳곳에서 ‘어드벤트 캘린더(Advent Calendar)’가 자주 눈에 띄더라구요. 이게 언제부터 이렇게 많아졌지?
순간 베를린의 겨울이 떠올랐어요. 슈톨렌을 넘어 캘린더까지. 유럽 본토, 특히 독일의 크리스마스 문화가 어느덧 서울에도 스며들었구나, 하는 생각에 묘하게 뿌듯했어요. 마치 내가 먼저 알고 있는 비밀이 이제야 모두에게 공유되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때, 옆에서 달력을 구경하던 손님이 툭 뱉은 말에 귀가 쫑긋했습니다. “어? 왜 달력이 24일까지 밖에 없어? 남은 날들은 어떡하라고?”
아, 이 낭만적인 물건을 아직 낯설어하는 분들도 있겠구나. 그래서오늘은 단순한 달력이 아니라, 아드벤츠칼렌더(Adventskalender)라는 이 아름다운 ‘기다림의 선물’에 대해 수다를 좀 떨어볼까 합니다.
“크리스마스 언제 와요?”라는 질문이 만든 발명품
어드벤트(Advent)는 ‘도래’, ‘기다림’을 뜻하는 라틴어(Adventus)에서 왔습니다. 기원은 19세기 독일로 거슬러 올라가요. 당시 아이들이 12월만 되면 매일같이 부모님을 볶아댔거든요. “엄마, 크리스마스 며칠 남았어?”라고요.
독일 사람들은 말로 설명하는 대신 ‘시간을 보여주기’로 했죠. 문에 분필로 날짜를 긋거나, 매일 밤 초를 하나씩 켜면서 어둠을 밝혀 나갔죠. 24개의 촛불이 모두 켜지면? 그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인 거죠. 이것이 바로 캘린더의 시초예요.
우리가 아는 종이 형태의 달력은 20세기 초, 뮌헨의 출판업자 게르하르트 랑(Gerhard Lang)이 만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쿠키를 달력에 하나씩 붙여주며 기다림을 가르쳐줬던 따뜻한 기억을 제품으로 만든거죠. 역시, 추억은 최고의 상품이 되죠?
유럽의 12월은 이걸 뜯는 재미로 산다
독일에서 시작된 이 문화는 유럽 전체의 거대한 리추얼이 됐습니다. 장르도 무한대예요. 11월 말이 되면 유럽의 백화점과 쇼핑몰은 거대한 ‘캘린더 쇼케이스’로 변합니다.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자신을 위해, 혹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이 달력을 고릅니다. 장르도 무한대예요.
독일의 최대 뷰티 편집숍 두글라스(Douglas)가 인기 화장품 24종으로 어른들의 허영심을 기분 좋게 자극한다면, 스위스 린트(Lindt) 초컬릿은 매일 다른 달콤함으로, 육가공 브랜드인 베이어부어스트콘토어(Weyher Wurstkontor)는 24종의 각기 다른 맛의 살라미를 뽐냅니다. 먹고 바르는 것 뿐만 아니죠. 덴마크의 레고는 매일 작은 브릭을 꺼내 크리스마스 마을을 짓게 하고, 로얄 코펜하겐은 서랍장마다 정교한 도자이 오너먼트를 숨겨둡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12월의 설렘을 네모난 상자에 꽉 채워 담아내죠.
내 책상 위, 이야기가 담긴 창문
화려한 브랜드 제품도 좋지만, 저는 독일 바이에른 주 여행 중에 사온 소담한 카드 캘린더가 마음에 들어요. 눈 덮인 알프스 산맥 위, 비운의 왕 루드비히 2세가 지은 노이슈바슈타인 성의 설경이 그려져 있죠.
눈 덮인 알프스 산맥 위, 비운의 왕 루트비히 2세가 꿈꾸던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ss Neuschwanstein)**의 설경을 담았습니다.
이 작은 카드의 매력은 ‘발견’에 있어요. 창문을 톡 열면 초콜렛이 아닌, 왕이 짓고 사랑했던 아름다운 성과 바이에른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상징들이 튀어나옵니다. 크리스마스에 관련된 이미지들도 곳곳에 자리해 있구요. ‘오늘은 뭐가 나올까?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하고 상항하는 즐거움이 촌콜릿의 달콤함보다 훨씬 오래가더라고요.
행복을 천천히 음미하는 방법
그래서 왜 25일이 없냐고요? 독일의 크리스마스는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아기 예수가 선물을 가져오는 24일 밤 ‘하일리거 아벤트(Heiliger Abend)가 하이라이트거든요.
저는 이 달력이 주는 메시지가 참 좋아요.
“행복을 한입에 털어 넣지 말고, 아주 조금씩 천천히 음미하라.”
단 하루의 파티에 열을 올리는 대신, 매일 아침 작은 창눈을 열며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어!”라고 설레는 시간들. 어쩌면 12월의 진짜 선물은 25일 아침에 받는 상자가 아니라, 그날을 기다리며 보낸 24번의 설레는 아침, 그 자체가 아닐까요.
남은 12월, 여러분은 어떤 기다림을 준비하고 있나요?
매일 조금씩 행복을 꺼내 드시길 바랍니다.
프로헤 바이나흐텐 Frohe Weihnachten (메리 크리스마스).





